"안녕하세요, 전 한국에서 온 XX라고 하고요, 최근 일을 그만두고 유럽을 여행하고 있어요."


유럽여행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카우치서핑과 히치하이킹이었다. 특히 카우치서핑으로 유럽을 여행한 여행기를 읽고 나서는 ‘그래 이런 게 진짜 여행이지.’라며 현지인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꿈을 꿨다. 하지만 메시지를 계속 보내도 카우치서핑이 처음이고, 추천의 글 하나 없는 나는 줄줄이 퇴짜를 맞았다. 그렇게 카우치서핑을 아예 포기할 무렵, 한줄기 빛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안녕, 네가 말한 날짜 괜찮은데, 다른 게스트랑 같이 방을 써야 할 거야. 상관없으면 우리 집으로와. 주소는..."


처음 받아보는 “okay” 메시지에 나는 바로 함부르크 행 버스표를 예매했다. 게다가 다른 게스트도 있다니 어색하지도 않고 더 좋을 것이다. 드디어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 카우치서핑이 이루어지는구나!

생전 본 적도 없는 나를, 카우치서핑이 처음이라 프로필에 추천의 글 하나 없는 나를 처음으로 재워준 사람은 함부르크의 천사, 나달 아저씨. 그는 30년 전에 시리아에서 독일로 건너와서 이제는 독일에서 산 날이 더 길다고 했다. 아저씨가 간단히 소개해준 방과 거실의 화이트보드에는 그동안 카우치서핑으로 이 집을 다녀갔던 게스트들이 남긴 행복한 메시지가 남아 있었고, 그건 아저씨 인생의 기쁨인 듯했다.


곧 먼저 와 있던 게스트, 미국에서 온 안나가 도착했다. 함부르크에서의 첫날이라고 아저씨는 인도의 난과 비슷한 시리아 식 애피타이저와 구운 연어, 그리고 감자튀김으로 구성된 맛있는 저녁을 차려 주셨다. 공짜로 재워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 근사한 밥까지 차려주시는 아저씨는 사람에게 베푸는 게 그저 즐거운지 시리아 술까지 만드셨다.


“카우치서핑하다 보면 딱 잠만 자고 호스트랑 이야기도 안 하고 가는 게스트들이 있거든. 그 아이들은 참 얌체 같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 숙박비를 아끼니까 자기들은 굉장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인생은 그게 다가 아니거든.”


아저씨의 그 말에 낮에는 함부르크 시내를 돌아다니다가도 해가 질 무렵이면 바로 집으로 가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안나와 함께 셋이서 이야기 했는데 안나는 항상 30분 후에 슬그머니 빠져 방으로 들어가 혼자 놀았고, 심심한 아저씨를 걱정하는 오지랖 넓은 나만 아저씨와 함께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시리아에 산 날보다 독일에 산 날이 더 많아. 독일 시민권도 있지만, 여전히 독일은 남의 나라야. 가끔씩 참 외로워."

                              
4년이란 시간 남의 나라에 살면서 가끔씩 주체할 수 없이 외로웠는데, 30년을 살아도 그건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느낌인가 보다. 독일인과 뿌리까지 섞일 수 없는, 그들과 매일 부대끼며 지내도 채워지지 않는 그 느낌. 나만 느낀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뭔가 위안이 되었다.


아저씨는 아침마다 프랑스 라디오를 들어서, 덕분에 아침 먹는 내내 우리는 ‘봉주르’를 들어야 했다. 아랍어, 독일어, 영어까지 3개 국어를 하지만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프랑스어를 공부하지 않은 게 가장 후회된다는 아저씨는 그 후회를 끝내려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단다. 그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날 부끄럽게 만들었다. 영어만으로 벅차다며 매번 제2외국어를 배우려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는데 아저씨를 보니 후회하기 전에 시작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같이 좋은 호스트를 만나서 전 운이 정말 좋아요. 고마워요.”

"고맙다고 안 해도 돼. 정말 나한테 고마우면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기회를 놓치지 마. 작은 행동이지만 그게 우리가 사는 곳을 좋게 만드는 일이야. 선 순환을 만드는 거지."


예수님인가? 아저씨는 먹여주고 재워주신 것도 모자라 교훈과 따뜻한 마음까지 안겨 주셨다. 마음이 한창 감동으로 차 오를 무렵 아저씨는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 게스트들한테 한 번도 이런 말 한 적 없는데 너 참 매력 있고, 좋은 사람 같아. 여행 잠깐 쉬고 독일에 좀 더 있으면 안 돼? 몇 달 동안 여기서 지내도 돼. 너 어차피 일도 그만 두었다며.”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아저씨는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부담스럽도록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정신이 화들짝 깼다.


“너 그 애랑 결혼할 거야?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어.”


독일인과 뿌리까지 섞일 수는 없어 항상 이방인 같다는 아저씨는 이런 부분에서는 뼛속까지 유러피언이었다. 황당하고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고마운 호스트라 뭐라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피곤하다 말하고 방에 들어갔다.


‘내일 당장 다른 데 찾아서 나가야지.’


하지만 나갈 때 나가더라도, 아저씨에게 이 찝찝한 기분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다음날 늦게 집에 들어간 나는 나를 걱정하는 아저씨에게 내 기분을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게 좀 이상한 것 같지만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기분 풀어. 우리 집에 머무는 게스트에게 안 좋은 기억을 주기 싫어. 이젠 너를 게스트로만 볼게.”

 
‘게스트로만? 아이고 아저씨, 제발 좀.’


그 이후 덜 따뜻해진 아저씨는 다른 게스트들 앞에서 일부러 날 놀리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려 했고, 그런 모습에 난 괜히 미안했다. 아저씨는 내가 떠나는 날 저녁에는 마지막이라고 맛있는 저녁을 만들었고, 내가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함부르크에 하루 더 머무르라고 했다.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게스트의 아침과 저녁까지 다 챙겨주고 신경 쓰는 호스트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사 왔던 머그잔을 선물로 드리고 함부르크를 떠나는 길, 색다른 여행의 기억을 만들어 준 나달 아저씨를 생각했다. 아저씨 때문에라도 함부르크는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유럽 독일 | 함부르크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돌아온싱언니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칠레 하우스(Chile haus)와 하펜시티(Hafen city)를 보기 위해 항구로 왔다. 독일 제 1의 항구이자 유럽 제2의 항구인 함부르크의 랜드마크인 칠레 하우스(Chile haus). 단한 군데의 빈틈도 없이 빨간 벽돌로 촘촘히 쌓아 올린 건물에 과연 철저하게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독일인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인간의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내면이 왜곡과 과장으로 표현된,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건물’이라는 설명을 보기 전에도 이미 따스함은 느낄 수 없었다.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차가운 느낌이 가득한 칠레 하우스와, 그 건물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나를 내려다보았다.

칠레 하우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칠레와의 무역거래로 큰 부를 쌓았다. 성공한 무역상이 지은 건물이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란 것이 보여주듯, 빨갛고 네모난 건물이 바다의 한 면을 둘러싸듯 들어서 있는 이 일대는 모두 상품 창고와 무역 회사였다. 괜히 부산에 온 듯 함부르크에 더 정이 갔다.

오래 된 건물에서는 최대한 건물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모든 물건을 옥상에 설치된 도르래를 이용해서 옮긴단다. 무엇보다 독특한 건 문도 없고 정지하지도 않는 엘리베이터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회전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눈치를 보다 뛰어들어야 한다. 아름다운 옛 건물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한다. 하지만 목이 없는 사람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됐다.


함부르크에서 가장 먼저 차를 수입해 판매했다는 곳은 이제 근사한 카페가 되었다. 터키인이 운영하는 페르시아 카펫 상점이 있고, 콜롬비아에서 직수입한 커피콩으로 커피를 만드는 유명 카페가 있었다. 그 어느 곳보다 수입품을 빠르게 입수하는 곳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하펜시티 근처는 이국적인 상점으로 가득했다.

‘항구 도시’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유흥가는 이곳 함부르크에도 어김없이 존재한다. 함부르크의 거대 어시장 뒤편의 상파울리(SaintPauli) 지역을 지나가면 ‘청소년 통행 금지’ 표지판을 붙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함부르크 최대의 유흥가 레파반 (Reeperbahn)이 나타난다. 기발한 아이디어의 야한 간판은 오히려 암스테르담의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다. 오후의 햇살 아래 서 있는 간판은 불편해 보였지만 구경하는 재미만큼은 쏠쏠했다. 그러다 그 길의 바로 끝에서 적당히 벽처럼 보이고 싶은 벽과 마주했다. 해리포터가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갈 때처럼, 벽 너머로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함부르크의 홍등가로 들어가는 입구. 18세 이하와 여자는 이 너머로 갈 수 없다는 경고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호기심에 살짝 넘어갔다가 출근 준비 중인 여자와 눈이 마주쳐 황급히 돌아 나왔다.

초창기 비틀즈는 5명이였다고 해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명이 더 서 있다.


사실 이 곳은 하룻밤의 유희를 찾는 사람들뿐 아니라 비틀스 팬들의 성지기도 하다. 이 민망한 간판이 즐비한 거리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비틀스 광장’으로 불리고 비틀스 철제 조형물까지 설치되어 있다. 그 비틀스 조형물이 손바닥보다 작은 속옷만 걸친 여자들의 사진을 마주하고 있는 게 참 우스웠다. 영국에서 건너 온 가난한 무명밴드 비틀스는 1960년부터 2년 간 이 곳 펍에서 노래하고연주하며 실력을 쌓았다.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만 가지고 영국에서 건너온 가난한 청년들에게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그 당시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스트립클럽과 성인 쇼가 난무하는 이곳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을 것 같다. 전설로 불리는 밴드의 시작은 술 취한 뱃사람들이 드나들던 허름한 펍이었다. 그 대단한 비틀스가 이 거리에서 묵묵히 실력을 기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도 무명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위안이 되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든, 연습하고 실력을 쌓다 보면 기회가 오는 걸까?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유럽 독일 | 함부르크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돌아온싱언니

상파울리와 레파반 지역만 보고는 함부르크는 옛 건물이 많이 없는 줄 알았는데 섣부른 판단이었다. 함부르크에서 가장 큰 성 미카엘 성당과 그 주변 건물들, 시티홀 등 중세 느낌이 물씬 나는 건물들이 많았다.

함부르크 하루 일정의 처음을 언제나 장식하는 알스터 호수를 출발점으로 해서 5분도 안 되는 곳에 위치한 함부르크의 시티홀. 브뤼셀에서 봤던 시티홀이 순간 떠올랐는데 그보다 훨씬 크고 넓은 느낌이다. 그리고 더 화려한 느낌. 중앙의 홀은 함부르크와 시티홀의 역사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었고 그보다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광장과 분수대가 반짝 거리고 있었다.

보험이 발달하게 된 계기는 무역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상품을 실은 배가 난파당하거나 해적을 만나는 등 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배웠다. 배 모형물과 안전한 항해를 책임지는 여신의 모형물이 디자인되어 있는 오래된 보험회사 건물. 예전의 역사 수업 시간이 생각난다. 실제로 이 일대는 부산의 중앙동처럼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러 회사가 밀집해 있는 구역. 적당히 어수선한 그 분위기가 부산의 부둣가와 회사들이 밀집해 있는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를 떠올리게 만들었는데, 이후에 독일의 다른 도시인 베를린, 예나, 슈투트가르트를 거쳤지만 함부르크가 가장 좋았던 건 아무래도 바다가 있기 때문인 듯싶다.

 

주변에는 주거지역도 꽤나 많이 보였는데 네덜란드에서 보았던 좁은 집들이 바다 주변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풍경이 펼쳐져 아시아에서 온 여행객에게 좋은 볼거리를 다시 선사해 주었다. 이런 벽돌집들은 언제 보아도 기분 좋아진다.

100년도 더 되었을 구식 엘리베이터가 아직 운행하고 있는 어떤 건물 안. 엘리베이터에는 문이 없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하체만, 혹은 올라가고 있는 상체만 보여 상당히 기괴한 장면이 연출된다. 그리고 Stop 버튼이 없어 놀라가는 때를 기다려 뛰어 올라타거나 뛰어내려야 한다. 난데없이 운동하는 느낌? ^^;


꾸물거리는 날씨와 왠지 잘 어울리는 벽돌색 건물을 따라 계속 걷다가 함부르크에서 가장 큰 성 미카엘 성당을 만났다. 1,600년대에 지어진 건물답게 파란만장한 역사를 함께한 성당은 화재에 휩싸이기도, 벼락을 맞기도 하면서 여러 차례 재건축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성당 종탑 부분이 본래의 벽돌 건물과 달리 철제로 지어진 이유도 더 이상 불에 타지 말라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성당 안에서 운 좋게도 오르간 연주 연습을 들을 수가 있었다. 간단한 건반 터치만으로도 굉장히 웅장한 느낌. 처음 듣는 오르간 소리에, 소리에 압도당하는 아니 압도보다 무언가 나를 내려보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든다. 마침 내리기 시작하던 비를 피해 성당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까지, 성당 안에선 작은 오르간 콘서트가 열린 듯하다.


긴 계단을 통해 올라간 성당 종탑에서는 함부르크 시내 전경을 어느 방향에서나 즐길 수 있었다. 어느 방향이나 물을 끼고 있는 도시. 성당에 들어올 때 조금씩 내리던 비는 탑에 올라왔을 때는 바람과 함께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더 오래 시내 전경을 즐기고 싶었으나 한기가 돌기 시작하는 몸은 성당 안에 다시 들어가자고 꼬드겼고, 결국 나는 성당 지하의 크립트(Crypt, 무덤)까지 돌아보고 말았다. 건물 안에 무덤이 있는 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봤지만, 이렇게 매주 미사가 열리는 곳 아래에 무덤이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성직자들과 함께 부유한 귀족들은 이곳 성당 지하에 묻혔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바깥 아무 데나 묻혔다. 부유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그렇게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렇게 종탑, 크립트까지 섭렵했건만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마침 배가 고파 근처 작은 가게에 들어가서 소시지가 들어간 빵 중 아무거나 골라 대충 배를 채웠으나, 비는 더 거세게 내린다. 아무래도 비 맞을 각오를 해야 될 듯 싶다. 젖어가는 지도를 들고 요한 브람스 박물관을 찾아갔다. 브람스라는 이름은 어릴 때 피아노를 치면서 들었던, 그의 곡을 연주하기도 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다. 피아노 치는 것 참 좋아했는데 그것도 한 때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여행을 하다 보니 잊고 있던 예전 기억들, 감성들이 살아나고, 잊고 있던 이름들도 함께 떠오른다. 그렇게 어린 시절, 6년간 배웠던 피아노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보려 브람스 박물관에 갔다.

몇백 년 전의 악보와 피아노가 이렇게 보존되어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연주했던 그 음악.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귀는 아직도 그 음악을 기억하고 있다. 여행마저도 내 기억에 의해 이렇게 주관적으로 그려지는데 여행 가이드 북을 열심히 보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메트로 역이 어딘지 알음알음 찾아서 다시 알스터 호수로 갔다. 비 오는 호수가 보고 싶어서. 운동화는 이미 다 젖어 발도 시려오고, 머리도 이미 비에 홀딱 젖었지만 우산 없이 이렇게 비를 맞는 게 참 좋아 계속 그러고 싶었다. 비에 아랑곳 않고 조정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요트도 있었다.

자유롭게 비를 맞을 수 있는 권리를 마음껏 누리는 하루여서, 더 감사한 날이다.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유럽 독일 | 함부르크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돌아온싱언니

동이 틀 때까지 사람들과 술을 마신 나는 정오가 지나서야 겨우 일어났다. 숙취에 절은 몸을 이끌고 벨기에에서 놓친 감자튀김으로 해장을 하며 느릿느릿 걸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오직 한 곳, 반 고흐 미술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 빈센트 반 고흐

4년 전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사춘기를 겪고 있을 때,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 보수공사 중인 틈을타 바다 건너온 고흐의 그림을 처음 보게 됐다. 그때 처음 받은 인상은 "치열함"이었다. 어느 터치 하나 대충한 것이 없는, 정말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의 그림 중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무심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를 보았다. 37세. 채 40세가 되기 전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자신의 천재성을 몰랐던 화가는, 9살에서 그림실력이 멈춰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4년 후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을 가는 길, 그 강렬했던 감정을 기억하는 내 가슴은 설레고 있었다.


미술관은 그의 그림뿐만 아니라 가족, 그가 들었던 음악, 읽었던 글, 만났던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 등 고흐와 관련한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세상에서 그를 가장 잘 이해했던 동생이자 친구였던 테오와 일생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미술관의 한 면을 거의 가득 차지했다.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은데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 생활비를 동생에게 받아가며 살았던 30대 남자, 고흐는 얼마나 비참했을까?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그의 이야기를 지나니 다시 한 번 주저함이 없는 거친 붓놀림에 눈이 간다.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단순해 보이면서도 세심한, 뭐라 설명할 수가 없는 그림들. 물감 살 돈이 자주 모자랐다고 하지만, 고흐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주저 없이 했던 일은 텅 빈 캠퍼스에 붓질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림에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열정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귀를 자른 이 사내를 단순히 미쳤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하다. 천재성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면 그런 것일까? 몇 년을 그려오던 그의 자화상에는 한결같이 불안정해 보이는 사내가 있다. 충만하지 않은 느낌.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면서 계속 그림을 그려나가는 마음은 어땠을까? 삶을 스스로 끝낸 고흐도 힘들었겠지만, 내게는 테오가 느꼈을 상실감과 형을 지키지 못했다는 무기력함도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고흐가 삶을 마감한 지 1년 후 테오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렇게 고흐를 아꼈던 테오의 뜻을 따라 테오의 부인이 고흐의 그림을 수집하고 그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로소 고흐는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 


고흐 미술관에서 오후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다시 숙소로 들어가는 길, 고흐의 삶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고단해져 힘이 하나도 없다. 그때부터였다.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고흐는 여행 중에 책을 읽지 않겠다는 내 다짐을 꺾어버렸고, 난 고흐의 평전 『불꽃과 색채』(슈테판 폴라첵 지음, 이상북스)를읽기 시작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고흐의 마지막 그림
The sadness will last forever

'왜 이렇게 힘들고 왜 이렇게 아플까?’


고흐는 여느 젊은이처럼 20대 초반 이런저런 공부와 일들을 하며 자신을 찾다가 마침내 그림을 발견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미술을 진로로 정한 사람들보다 시작이 늦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찾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찾아도 결코 행복하거나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이 사내는 보여준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는 인간을 너무 사랑했다. 사람들의 고단한 삶에 녹아들지 않고 뜬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대던 목사를 저주했고, 그림을 돈의 가치로만 환산하는 부자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고민과 열정과 사랑은 남들에게 광기로 보였던 걸까? 오히려 고흐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욕하고 피했다. 그래서 그렇게나 아팠던 고흐의 유언은 "The sadnesswill last forever"(고통은 영원하다)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 지속되고 늪과 같은 가난 속에 있어도, 나는 미치지 않고 원하는 바를 끝까지 추구할 수 있을까? 내 안의 열정을 지필 곳을 찾지 못해 아프고, 날 슬프게 하는 것들에 도움이 되지 못해 아프다. 그가 느꼈을 아픈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문득 겁이 났다. 내 가슴이 느끼는 그것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 나도 이렇게 아플 수가 있겠구나. 그리고 그게 심해지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겠구나. 그의 그림도 아팠지만, 난 무엇보다 그의 삶이 그렇게 아팠다. 암스테르담에서부터 보던 그의 평전은 독일의 함부르크로 넘어가서 끝이 났다. 그래서 난 함부르크에서 좀 아팠다. 그가 가진 것만큼 열정이 없어서 아프고, 내 안의 사랑을 제대로 세상에 내보이지 못하는 비겁함과 게으름에 화가 나고, 그것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해 미쳐버릴까 봐 겁이 났다. 어쩌면 그래서 그림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반 고흐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5년 후에 다시 한 번 그 미술관에 가고 싶다. 그때는 좀 더 당당하게 고흐를 만나고 싶다.

"우리에게 뭔가 시도할 용기가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고흐의 모든 그림은 네이버 지식사전에서 가져왔어요.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유럽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돌아온싱언니

그렇게 더웠는데 어제저녁부터 쌀쌀해지더니 오늘 아침은 잔뜩 흐리다. 하지만 예정했던 대로 암스테르담의 근교로 떠나 본다.


1. 암스테르담의 중앙역에서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달려가면 도착하는 지금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작은 마을. 관광안내소도 있지만 문 열지 않았고, 작은 교회당에서는 100년은 된 듯한 책과 엽서를 판매하고 있다. 나 같은 외지인에게도 조용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해 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내 무릎 높이보다도 더 낮은 담장을 가진 집에서 살고 있다.

이끼 낀 지붕, 참 좋다.


아이들이 야외수업을 나왔다. 선생님이 손을 절대 놓지 마라고 했는지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서로 손을 꼭 잡고 있다. 정말 앙증맞다. 하지만 선생님의 풀 설명보다는 내가 더 신기한지 전부 나를 쳐다봐서 괜히 선생님께 미안했다. 이렇게 자연과 가까운 곳에 살며 소와 양, 말을 매일 보고, 들판에 핀 꽃을 구분할 줄 아는 아이로 큰다는 것은 꽤 멋진 것 같다. 나도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가 어릴 때는 교외에서 키우고 싶다.

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급기야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잠시 몸을 피해야겠다.


2. 한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나타났다. 얼마만에 보는 무지개인지 게다가 이런 배경으로 무지개를 볼 수 있다니 오늘 운이 참 좋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도시가 뽀송뽀송해졌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에담'이라는 도시. '에담'치즈로 유명한 치즈의 도시란다. 중심가에는 치즈 가게가 여럿 자리 잡고 있고, 기념품 가게도 있다. 'Edam Cheese cake'이라는 단어의 나열을 보자 허기가 진다. 식당의 한 쪽에 자리 잡고 앉아 치즈 케이크를 음미해 본다. 꽤 맛있다.

 "넌 어디서 왔니?"

 "한국이요."

 "당연히 남한이겠지?"

식당에서 맥주 한 잔 하시던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때가 북한이 도발을 일으켰던 때라 네덜란드 뉴스에도 연일 한국 소식이 많이 나왔는데 역시나 아저씨가 한국 괜찮냐며 내게 물어보신다. 그러다 말 거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드렸는데 갑자기 궁금증이 밀려왔나 보다.

 "한국은 어쩌다가 분단이 됐니?"

 "그전에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는데 해방이 되면서 남쪽이랑 북쪽에 따로... 어쩌고 저쩌고.."

 "아 그렇구나. 근데 왜 일본은 한국을 왜 식민지로 삼았니?"

 "일본은 섬나라인데 한국이 제일 가깝고... 어쩌고 저쩌고."

내 설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엄지를 들어 올리며 고맙단다. 한국인을 태어나서 처음 만난 거라고 한다. 내가 알크마르에 치즈시장 보러 갔었다고 하니 치즈를 보려면 에담을 먼저 왔어야 했다며 내게 살짝 핀잔을 준다. 

다시 시작된 나 혼자 에담 투어. 아까 들렀던 작은 마을보다는 훨씬 큰 마을. 작지만 나름 광장도 있고,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적지 않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버스를 타고 근처의 아무 마을로 이동해 본다.


3. 해 질 무렵 도착한 마을. 역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예쁜 교회와 예쁜 가게들. 그리고 그곳까지 나를 따라온 것 같은 무지개로 완벽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곳.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마당이 있는 집들을 많이 본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에서 절대 볼 수 없던 마당이 딸린 집을.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암스테르담으로 다시 넘어왔다. 해가 지고 밤이 시작되었는데 암스테르담에 오니 네온사인으로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것 같다. 오늘이 레베카의 생일이니 한 잔 하러 가자고 한다. 두 시간 정도 놀다가 그것도 재미가 없는지 피곤한지 그만 쉬고 싶어 져서 일찍 잠에 들었다.  아마 낮에 느낀 감성을 계속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유럽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돌아온싱언니
 "그거 알아? 우리 네덜란드인들은 10대 때 딱 2가지만 배워."


 "그게 뭔데?"

 "뭐 먹고 싶어? 뭐 하고 싶어?"

  "내가 과장 좀 했는데, 어릴 때부터 우린 항상 질문을 받아. '뭐 먹고 싶니?', '어디 갈래?', '뭐하고 싶니?' 같은 간단한 질문부터 정치, 경제에 대한 생각까지. 그러다 보니 내가 평소에 생각이 없으면 아무 대답도 못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 덕분에 국민들 각자가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갖고 있어. 난 우리나라 교육 좀 괜찮은 거 같아."


What do you want to do? What do you want to eat?"


게스트하우스에서 근무하며 새벽에는 그래피티를 그리러 다니는 자유로운 영혼, 페리. 그는단 두 문장으로 네덜란드인이 받는 교육을 간결하게 압축시켜 버렸다. 공교육만으로 대부분의 국민이 2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도 부럽지만, 그보다는 각자 ‘생각’을 할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란다는 말이 참 근사하다. 매춘과 대마초가 합법이 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교육 때문이 아닐까? 


"그럼 그래피티가 합법이야?"

"당연히 불법이지. 그래서 경찰 뜨면 도망가야 돼!" 


새벽에 돌아다녀서 그런지 대마초 때문인지 항상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있는 그 아이는 꼭 『해리포터』에 나오는 스네이프 교수처럼 피곤해 보이지만, 그래피티를 이야기하는 순간은 눈이 반짝거린다. 그렇게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며 전 세계 여행객들과 이야기하고, 그래피티를 그리는 삶이 좋단다.

나한테는 그림 그리고 술 마시는 게 휴가야.

로비에 새로 들어오는 여자에게 페리가 인사를 했다. 그녀는 술잔을 들고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영국에서 온 레베카는 까다로워 보이는 첫인상과 다르게 굉장히 붙임성 있었다. 바에서 계속 맥주를 들이키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본인의 스케치북. 그걸 보여주며 한 장 한 장 본인의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그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다. 게다가 그 스케치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그대로 팔에 문신까지 해 버렸다. 그녀는 미술 전공을 하고 있으며 일주일 동안 암스테르담에 휴가를 왔다. 레베카에겐 그림 그리고 술 마시는 게 휴가였다. 실제로 오후에는 암스테르담의 조용한 카페나 운하 근처에 앉아 몇 시간이고 계속 그림을 그리고 밤새도록 파티에서 놀다가 해 뜰 때쯤 돌아와서 잤다. 그리고 오후에 일어나 그림 그리는 일상. 그것을 일주일 내내 암스테르담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감을 주는 고흐의 미술관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그 아이를 보고 내가 지금까지 간 ‘휴가’라는 것들을 돌이켜 보았다. 블로그에서 봤던 “XX에서 꼭 해야 할 것”대로 걷고 음식을 먹은 게 아닐까? 대체 휴가를 간 건 나인가, 블로그 주인인가? 인증샷을 찍고 발도장을 찍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게 휴가가 아닐까?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먼저 생겼다는 커피숍(네덜란드의 커피숍은 대마초를 파는 곳이다)
 "너희는 11개월 일하고 1개월 휴가 가지? 나는 11개월 여행하고 1개월 일해." 

 "비용은 어떻게 충당해요?"

 "11개월 동안 내 수만 마리의 일꾼(꿀벌)들과 퀸(여왕벌)이 날 위해서 열심히 일해 놓으면 내가 남아공에 돌아가서 1개월 동안 일을 하지. 그리고 그 돈으로 다음 11개월 동안 다시 여행 다녀. 큰 돈은 아니라 고급스럽게 여행은 못해도 배낭여행은 충분히 할 수 있지."


60개국이 넘는 나라를 돌아다니며 30년간 여행 중인 산타클로스의 수염을 가진 에드워드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배낭에서 식빵과 잼을 꺼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고급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예순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가 젊은이들이 주로 오는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룸을 숙소로 삼은 것도 그랬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정말 여행을 좋아했고, 가지고 있는 돈 안에서 그걸 하고 있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 네덜란드 방문이라는 할아버지에겐 여행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삶의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게 아닌 삶 자체였다. 


나 역시도 살아있는 동안 되도록 많은 곳을 여행하고 싶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여행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은 볼 때마다 놀랍다. 사실 인간은 유목민이었는데 언제부턴가(아마도 벼농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정착했다. 사람들이 언제나 여행을 꿈꾸고 버킷리스트에 세계일주를 넣는 이유는 우리 피 속에 아직 남아 있을 유목민의 DNA 때문이 아닐까? 


새로운 것을 보고자 떠난 여행에서 가끔은 그곳의 풍경보다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정말 ‘지 맘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거창한 삶의 철학이랄 것도 없다. 그저 남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걸 하며 살아간다.


 “3개 국어를 하면 이런 작은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고급 호텔 지배인으로 일하면 안 되나? 그리고 그래피티 말고 돈 되는 그림을 그리면 안 될까?

 “네덜란드까지 와서 풍차 안 보고 뭐하냐?”

 “양봉사업이 잘 되면 몇 달 더 일해서 그걸 확장시키면 돈을 더 많이 벌 텐데.”


지 맘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상반되는 두 감정. 사회가 만들어놓은 길대로 가는 것에 익숙한 나는 그들에게 값싼 걱정을 보내지만, 가슴 한편은 씁쓸하다. 사실 그런 자유와 당당함이 부럽다. 시키는 것을 최고로 잘 해내는 나는 결정하라고 하면 그때부터 바보가 된다. 내 취향마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한국에서 배운 잣대로 그 삶을 멋대로 평가한다.


남들이 만든 길 따라 사는 것이 최고라 해서 그렇게 살았는데, 난 ‘생각 불능 상태’가 되었고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 저렇게 지 맘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저러다 돈 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거 하면 돈 벌 수 있어? 그거 하면 스펙 생겨? 인맥 생겨? 우리가 만들어 놓은 안전한 기준은 내게 행복은 커녕 만성적인 욕구불만만 주었다. 항상 불안했다. 어쩌면 진짜 저 아이들처럼 지 맘대로 사는 게 답이 될 수 있을까?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유럽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돌아온싱언니

이튿날 아침 서둘러 일어나 바티칸 시국으로 간다. 로마 안에 있지만, 이탈리아가 아닌 엄연하게 다른 나라. 하지만 입국하기 위해 여권이 필요하지는 않다. 바티칸 박물관의 높다란 벽이 바티칸 시국과 로마를 구분 짓는 경계일 뿐. 












종교 그 자체인 바티칸 시국으로 들어가기 직전 눈에 띈 성인용품점 광고를 재미나다며 사진 한 방 찍곤 바티칸 박물관으로 왔다. 그 높은 벽의 웅장함을 느낄 새도 벽을 빙 둘러싸고 있는 긴 줄의 행렬. 그러고 보니 오늘은 월요일.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 바티칸 박물관의 특성상 월요일에 많은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또다시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멍 때리고 있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길에서 카드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물건을 팔거나,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바티칸 박물관 입장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매력적인 박물관 투어 상품을 팔고 있는 여행사 직원들..










드디어, 드디어 입장한다. 맨 처음 나를 반겨주는 것은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25살에 조각했다는 '피에타 상'의 모조품. 실제 작품은 성 베드로 성당의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있다. 스물다섯이란 나이에 이미 엄청난 작품을 만들어낸 그에게 왠지 모를 질투가 느껴진다. 나 같은 사람이 없지는 않았던지 그의 피에타 상을 따라 조각하던 어느 조각가는 몇 번의 시도와 실패에 좌절하여 실제 피에타 상의 성모 마리아의 코를 망치로 쳐 버렸다고 한다.

 '질투는 나의 힘' -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일 만큼 질투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이고,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에너지가 어떻게 표출되느냐에 따라서 많은 게 달라진다. 실제로도 상당한 질투심과 꼬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미켈란젤로는 그의 에너지를 명작을 만드는데 썼지만, 어느 작가는 질투심을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써버렸다... 












처음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시작했듯이, 이곳 바티칸 박물관 관람의 끝도 미켈란젤로의 시스타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이다. 대부분의 관람객이 천지창조를 보러 이곳에 온다는 것을 아는 박물관 관계자들이 박물관의 이동경로 자체를 아예 시스타나 예배당이 제일 뒤에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많은 작품들도 강제로 관람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기다렸던 것처럼 박물관 내부 역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의 행렬에 같이 휩쓸려 이리저리 같이 돌아다닌다. 


바티칸 시국에 있는 박물관 답게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많은 그림들이 눈에 띈다. 그림을 그리는 기법, 사용하는 도구 등 많은 것들의 변화가 눈에 보이지만 그래도 그리스도라는 한 가지 주제는 영원하다. 아기 예수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까지... 이렇게 몇 천년 동안 한 사람을 주제로 이렇게 놀라운 예술활동이 펼쳐졌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은 참 대단하다.

루브르에서 본 것 같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을 경배하는 동상과, 이집트가 얼마나 핍박받고 살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이집트 유물들을 뒤로 하고, 또 하나의 명작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철학을 주제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모습을 재기 넘치게 그린 그림. 누가 누구인지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계단에 널브러져 있는 디오게네스, 못생긴 들창코의 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등. 50명이 넘는 사람이 그려져 있지만 대부분 나는 잘 모른다. ^^ 한국인 단체관광객을 이끌고 온 가이드 덕분에 그림에 대한 설명을 몰래 들으며 그림을 감상하는 중,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모든 한국인 관광객들이 갑자기 바티칸 미술관 티켓을 들고 "아테네 학당" 그림을 배경으로 바티칸에 왔다는 인증샷을 찍고 있다. 

 "이렇게 하면 멋진 인증샷이 되죠? 카톡 배경에, 블로그에 올리시면 돼요~" 

한국과 중국 투어에서만 찾을 수 있을 그 장면을 보며 그들에게 미안했지만 20명이 갑자기 같은 사진을 찍는 장면이 부끄러워 그 방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사람의 물결에 지쳐 이제 그만 박물관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박물관이 그렇게 숨겨두었던 마지막 장소 '시스타나 예배당'에 도착하였다. 다가갈수록 어두워지는 조명, 그리고 늘어나는 정체구간. 그렇게 기다리기는 몇 분. 드디어 그림으로만 보아왔던 시스타나 예배당의 천장화가 내 머리 위에 펼쳐져 있다. 구약 성경의 각 부분을 친절하게 그려놓은 대작. 발 디딜 틈도 없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덕에 그 성당의 정체 천장을 채우고 있는 그림을 자세하게 다 보진 못하였다. 그리고 목도 꽤 아프다. 더군다나 "No Photo"를 외치며 사람들 사이를 끊임없이 비집고 다니는 경비원들 덕에 분위기는 상당히 어수선하다. 비록 구약성경을 반 정도만 읽어 모든 내용을 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볼 때면 아는 척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우리나라 성형외과의 광고로도 쓰이는 천장화의 '천지창조' 부분은 천장의 정중앙에 위치해 항상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다. 천장의 높이도 어마어마한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그려낸 걸까.

그리고 한 벽을 전체 채우고 있는 "최후의 심판".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천국으로 가는 자들과 지옥불에 떨어지는 자들이 한 그림 앞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멋진 몸을 하고 있는 젊은 예수가 있다. 이 어마어마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표정과 몸이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바티칸 박물관의 나선형 출구

그 괴팍한 성격 덕에 좋지 않은 인간관계, 그리고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사람들, 밀리는 급여에 지체되는 작업, 돈 달라고 괴롭히는 아버지와 형, 아픈 동생 그리고 오랜 천장화 작업으로 인해 얻은 목 디스크... 미켈란젤로는 그 상황에서 이렇게 대작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런 상황이 그로 하여금 오히려 몰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도록 그를 이끌었을까. 천재성만으로는 이런 대작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항상 우울함과 불행을 느끼며 살았다고 하는데, 그 덕에 우리의 눈은 이렇게 호강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들의 인생에 힘든 일이 많았을 때, 불후의 명작이 탄생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우리 같은 범인은 힘든 일이 그에게 발생한 것에 대해 묘한 감사를 해야 하는걸까...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유럽 바티칸_시국 | 바티칸시티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돌아온싱언니


로마에 왔지만, 로마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이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 어떤 편견-그것도 남이 만들어 놓은- 없이 로마를 만나고 싶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고대 로마는 내 기억 속에 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로마는 고대 로마 제국이 역사의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다른 시대의 역사에서는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기에 도시의 대부분이 고대  유적뿐이다. 그래도 내 기억을 쥐어 짜보며 로마를 기억하려 애써 보지만, 언제나 그렇듯 10년 전의 기억이 제대로 날리는 없다. 

그저 지금 내 눈 앞에는 파리보다 조금 더 더러운 로마의 거리와, 파리만큼 엄청난 낙서의 연속일 뿐이다. 싱가포르처럼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 깨끗하고 높은 빌딩 없이, 더러운 거리의 민낯을 보며 그저 낄낄 거릴 뿐이다. 이러니 사람 사는 곳 같잖아. 그 해방감에 이곳 로마에서 마구 뛰어다니고 싶을 지경이다.











로마에 온 보람이라면 바로 이것인가. 숙소 근처의 후줄근한 식당에서 아무렇게나 시킨 피자와 스파게티도 굉장히 맛있다. 이 가격에 이런 맛이 나온다니. 
















든든히 배를 채우고 다시 떠나는 길. 도시 전체가 유적지인 곳에 당연히 박물관도 많다. 역시나 아무 정보도 없이 단지 너무 더워 걷기 힘들 때 눈앞에 띈 박물관 안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로마에서, 박물관에 들어가 보아도 다시 천장 없는 전시실도 연결되는 일이 부지기수. 










이곳 역시 당시의 귀족들과 관련된 곳이라고 했는데 한창 발굴이 진행 중이다. 어떤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에서 불과 5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만큼 꽤 중요한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인도를 둘러싸고 있는 발굴 현장. 아무리 고대시대 이후로 힘을 잃어버린 로마라고 해도, 거의 파탄난 경제상황인 이탈리아라고 해도 결코 우리가 로마를 무시할 수 없는 로마의 저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옛날 거의 오늘과 비슷한 수준의  생활환경과 문명을 일구어 내며, 현대 문명의 뿌리를 만든, 그리고 여전히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굴 중인, 그 로마를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겠는가.

근데 근처에 바다가 있는가? 갈매기떼가 굉장히 많다. 심지어 갈매기의 (분비물) 습격을 조심하라는 경고판까지 붙어 있다!

로마의 한여름은 동남아의 날씨와 거의 맞먹지만, 그나마 습도가 낮아서 그늘에만 있으면 매우 시원하다. 로마 시내의 회전 교차로 중앙에 높다랗게 자라고 있는 야자수를 보며 이곳의 여름 날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거리에서는 일사병을 막기 위해 AS로마의 협찬을 받은 생수가 무료로 배포된다. 얼마나 더웠으면...?

가이드북을 읽지 않은 탓에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디를 꼭 가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그저 지도에 나온 곳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로마 여행과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여행을  떠난 지 1달 반이 지났을 무렵 한국음식이 너무 그리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인민박을 찾았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로마와 파리에서 뭘 먹고, 사고, 어디를 갔다며 몇 명이 같은 레퍼토리를 내게  이야기해줬다.  패키지여행을 온 것도 아닌데 어쩜 그렇게 다들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나중에 저들에게서 여행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될지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다시 로마 이야기로 돌아와서 "로마의 휴일"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갔다는 분수와 스페인 광장 등이 표시되어 있는 곳에  끌려갔지만 공사 중이라 분수에는 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스페인 광장의 돌계단 위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그곳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게 금지되어 있단다. 알고 보니 오드리 헵번이 그 계단에서 젤라토를 먹었다고... 그 영화를 보지 않은 나로서는 저 계단 위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과연 그 영화를 봤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 계단을 오르는 내내 들러붙는 잡상인들. 

"Beautiful lady, this is for you." 

 끊임없이 뻐꾸기를 날리며 장미 한 송이를  건네주시는 분들. 하지만 얼떨결에 장미를 받는 순간 난 돈을 내야 한다. 


파리와 로마에 이렇게 많은 오벨리스크는 약소국 이집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깟 오벨리스크 몇 개가 없더라도(!) 남아 있는 엄청난 양의 문화재에 대한 이집트의 자신감을 보여 준다. 약탈해 왔을 수도 있고, 전리품일 수도 있는 오벨리스크는 바다 건너 로마와 파리에서 꽤 잘 적응하고 있다. 심지어 이곳 오벨리스크의 위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다. 여러 가지 오만 신들을 다 믿었던 이집트 사람들이 만든 오벨리스크에 떡 하니 세워져 있는 십자가가 왠지 우습다.

관심 없는 명품 거리는 빠른 속도로 지나쳐 버리고 파리에서도 봤던 판테옹에 입장한다. 이곳 역시도 이탈리아의 역사에 큰 공헌을 세운 여러 영웅들을 모셔놓은 곳이다. 다만 다분히 공적인 느낌이 가득했던 파리의 판테옹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조금 더 자연스러운 느낌과 함께 원래 건물이 지어졌던 목적대로 에배도 같이 드릴 수 있다. 근대 문명의 중심지였던 파리 역시도 로마에 빚지고 있는 게 많아 보인다. 

더위에 지쳐 헤롱 거리고 있을 때. 자그마한 광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예술의 향연.(이라고 부르고 싶다.)

 4명의 아저씨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은 공기 중에 퍼지고, 눈 앞에는 로마의 그림들이 한 가득 광장에 널려 있다.  한 장에 5유로 내지 10유로 하는 전형적인 판매용 그림들이지만, 하나같이 다 아름답다. 만약 지금 다시 로마를 간다면 그 그림 중의 하나를 구입했을 텐데... 

4명의 아저씨들은 돈을 버는 것보다는 그저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  즐거워하고 있었다.  연주하는 내내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에서 내 마음도 같이 따뜻해진다. 이 무명의 밴드는 본인들이 이 한 명의 여행객을 따뜻하고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적어도 지금 이 광장에서만큼은 이 분위기에 참 행복하다. 












걷기에 지치고 피곤하지만 숙소로 가기는 싫어서 로마 테베레 강을  1시간가량 오가는 보트를 했다. 사람이 있는 곳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가만히 앉아서 그렇게 도시를 바라보는 그 기분이 참 좋아서. 거리만큼 강에서 보는 풍경이 그렇게 아름답거나 하지는 않았다. 강둑 곳곳에는 여전히 낙서가 즐비하고, 놀러 왔는지 살고 있는지 구분이 가질 않는 사람들이 다리 아래에서 텐트를 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낚시를 하고 있다. 그래, 사실  문화재보다는 이렇게 사람들이 도시와 삶을 비비적대고 있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테베레 강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여전히 이곳은 사람 사는 곳, 로마이다.










그렇게 로마 시내 곳곳에 내 발자국을 남겨놓고 일찍 숙소로 가서, 더위를 반쯤 먹고 지쳐 빨리 곯아떨어졌다. 내일은 로마 안의 작은 나라 바티칸으로 가는 날.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유럽 이탈리아 | 로마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돌아온싱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