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네이버 영화

한창 감수성이 퐁퐁 솟아나던 고등학교 1학년,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츠지 히토나리 지음, 소담출판사)란 책을 읽었다. 러브신이 나오는 장면에선 혼자 얼굴 빨개져서 가슴 벌렁대며 읽다가, 헤어진 연인(아오이)을 잊지 못하면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남자 주인공 준세이를 이해 못하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스무 살에 만났던 준세이와 아오이는 아오이가 서른 살이 되는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쿠폴라(반구형으로 된 지붕이나 천장)에서 만나기로 한다. 어찌나 로맨틱하였는지 10년이 지나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던 둘은 결국 두오모에서 다시 만난다.


“우리도 2년 후에 약속 정해놓고 만날까? 우리가 그때까지 만나든 헤어지든 상관없이?”


스무 살의 어느 날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 영화로 개봉된 『냉정과 열정 사이』이야기를 하다가 장난스럽게 약속했다. 군대라는 거대한 산을 앞에 두고 있던 우리에게 서른 살은 존재하기나 하나 싶을 정도의 먼 날이었다.


‘피렌체는 과거야. 나는 그곳에서 과거를 복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


영화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 타령을 하며 툭하면 넋 놓고 먼산을 보던(‘멍 때리기 대회’에 나가면 우승 가능성이 높은) 준세이에게서 ‘피렌체=과거’라고 세뇌당한 채로 도착했다. 그 책을 재미나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에 대한 기대를 가득 안고.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약속했던 그 두오모 성당, 드디어 나도 그곳에 왔다. 어린 시절의 사랑을 여전히 믿었던 두 연인은 10년이 지나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좋아한다는 마음에 믿음 대신 의심을 보냈던 나는 이곳에 혼자 서 있다. 믿음이 부족한 자는 종교뿐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 당장은 더 많이 믿는 사람이 손해 같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그 순간에 더 많은 믿음과 사랑을 보낸 쪽이 더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아오이가 왜 하필 성당 꼭대기를 만남의 장소로 정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두오모 성당에 꼭 가 보겠다고 다짐했던 10년 전의 그 소녀는 그곳에 한 번 들어가 보겠다고 줄 서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치여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오이의 생일은 아마 여름은 아니었을 거다. 성수기 한여름이었다면 관광객에 치여 성당 입장에만 몇 시간을 기다리고, 막상 올라가서는 셀카봉을 들고 설쳐대는 수많은 사람들에 치여 정작 준세이 그림자도 못 봤을 것이다. 것도 아니면 긴 기다림에 지쳐 올라가기를 포기했거나. 그렇다. 피렌체에 들어선 지 1시간, 괜히 난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예쁜 원피스를 입은 시원한 키의 여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버스킹도 역시 그 지역에 어울려야 되는 듯 아름답고 차분한 선율이 대성당 앞마당을 가득 채웠다. 나의 열등감은 내 믿음만큼이나 가벼웠던지 그녀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음악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두오모 성당은 내부도 멋있지만 붓으로 칠한듯한 외관이 아름답고 독특하다. 초록과 하얀색의 조합은 묘하게 아름답지만, 왠지 쉽게 벗겨질 것 같아서 자주 관리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항상 마음을 쓰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걸 가르치려는 옛사람들의 의도가 아닐까?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줄 알고 함부로 대하는 관계는 결국 끝이 나기 마련이니까.


두오모 성당에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지 10년인데, 막상 와 보니 쿠폴라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다. 희미해진 기억과 함께 두오모의 쿠폴라에 오르는 꿈도 옅어진 걸까? 두오모 성당의 사진만으로도 행복과 서글픔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의 뜨거움은 무덤덤함으로 변했다. 아쉽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씁쓸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덜 북적이는 두오모 대성당 맞은편, ‘조토의 종탑’ 꼭대기에 올랐다. 빨간 지붕의 피렌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씁쓸함이 사라지고 탄성이 나왔다. 준세이를 이끄는 건 언제나 과거였지만, 현재의 나를 이끄는 건 ‘어디 가야 사람이 좀 더 없을까? 어디 가야 좀 더 편할까?’였다. 10년 동안 가 보고 싶었던 두오모 따위가 아니라.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강에는 소설가 단테가 그의 첫사랑 베아트리체를 만난 베키오 다리가 있다. 굳이 그 다리를 찾을 수고도 없이 멀리서 사람들의 머리가 빽빽이 보이는 다리를 봤다면 그 다리가 바로 베키오 다리다. 『냉정과 열정 사이』부터 소설가 단테라니…… 피렌체는 정말 로맨스가 뚝뚝 묻어나는 곳이다. 양쪽으로 상점이 들어선 다리는 굉장히 독특하지만, 그 때문에 정작 다리 위에서 강을 볼 수는 없다. 예전에는 다리를 따라 푸줏간이 길게 늘어서 있다고 했는데 그곳의 냄새가 싫었던 왕은 푸줏간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고 대신 보석 가게를 들였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베키오 다리 위에는 보석 가게가 넘쳐난다. 로맨틱한 감정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연인들이라면 여기서 반짝거리는 것을 손가락에 끼고 나오겠지? 다리 위의 보석가게를 그대로 남겨둔 건 바로 그 이유가 아닐까? 보석가게 때문에 자물쇠를 달 틈이 없는 다리지만, 사랑을 약속하고 싶은 연인들은 기어코 자물쇠를 달아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곳에 단거야? 꼭 그렇게 해야 너희의 사랑이 영원하니?’라고 묻고 싶지만, 『냉정과 열정 사이』가 소설이라면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실존 인물들이다. 실화가 주는 감동은 사람들을 이 곳으로 이끌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물쇠를 걸게 만든다. 그렇게 자물쇠는 인기상품이 되어버렸다.

다리를 건넜다. 시끄러운 곳에 있다가 상대적으로 조용한 반대편으로 오니 그제야 아름다운 피렌체가 보였다. 깨끗하지 않지만 조용하게 흐르는 강과, 귀여운 젤라토 가게,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유유 히도시를 즐기는 사람들. 그 풍경이야말로 이곳을 정말 로맨틱하게 만들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과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니 마침내 피렌체가 나타났다.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석양을 만끽하기 위해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왔다. 이곳도 이미 유명한 곳인 듯 기념품을 파는 트럭과 좌판이 쫙 깔려 있었고, 사람들은 광장의 계단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지는 태양과 피렌체의 빨간 지붕은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곳에 있어 감사한 마음이 샘솟았다. 

과거에 사는 찌질남이라며 준세이를 타박했지만, 막상 피렌체에 와 보니 그런 그가 이해됐다. 덕분에 피렌체에 와서 아주 오래 동안 잊었던 얼굴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내가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란 상상을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참 잊기 힘들 줄 알았는데 결국은 잊었다. 그리움도 과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수많은 기억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영화 속 주인공들과 달리 난 첫사랑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그래서 많이 아팠다 한들 그게 뭐 어떤가? 덕분에 나는 한 사람을 나의 우주로 여겼던 그 시절에 머물렀으면 몰랐을 더 다양하고 큰 세상을 알게 됐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를 보낼 수 있고, 영화를 보고 울 수 있는 감수성을 갖게 됐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아낄 수 있게 됐다. 그런 지금의 내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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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이탈리아 |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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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돌아온싱언니

이튿날 아침 서둘러 일어나 바티칸 시국으로 간다. 로마 안에 있지만, 이탈리아가 아닌 엄연하게 다른 나라. 하지만 입국하기 위해 여권이 필요하지는 않다. 바티칸 박물관의 높다란 벽이 바티칸 시국과 로마를 구분 짓는 경계일 뿐. 












종교 그 자체인 바티칸 시국으로 들어가기 직전 눈에 띈 성인용품점 광고를 재미나다며 사진 한 방 찍곤 바티칸 박물관으로 왔다. 그 높은 벽의 웅장함을 느낄 새도 벽을 빙 둘러싸고 있는 긴 줄의 행렬. 그러고 보니 오늘은 월요일.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 바티칸 박물관의 특성상 월요일에 많은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또다시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멍 때리고 있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길에서 카드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물건을 팔거나,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바티칸 박물관 입장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매력적인 박물관 투어 상품을 팔고 있는 여행사 직원들..










드디어, 드디어 입장한다. 맨 처음 나를 반겨주는 것은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25살에 조각했다는 '피에타 상'의 모조품. 실제 작품은 성 베드로 성당의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있다. 스물다섯이란 나이에 이미 엄청난 작품을 만들어낸 그에게 왠지 모를 질투가 느껴진다. 나 같은 사람이 없지는 않았던지 그의 피에타 상을 따라 조각하던 어느 조각가는 몇 번의 시도와 실패에 좌절하여 실제 피에타 상의 성모 마리아의 코를 망치로 쳐 버렸다고 한다.

 '질투는 나의 힘' -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일 만큼 질투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이고,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에너지가 어떻게 표출되느냐에 따라서 많은 게 달라진다. 실제로도 상당한 질투심과 꼬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미켈란젤로는 그의 에너지를 명작을 만드는데 썼지만, 어느 작가는 질투심을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써버렸다... 












처음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시작했듯이, 이곳 바티칸 박물관 관람의 끝도 미켈란젤로의 시스타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이다. 대부분의 관람객이 천지창조를 보러 이곳에 온다는 것을 아는 박물관 관계자들이 박물관의 이동경로 자체를 아예 시스타나 예배당이 제일 뒤에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많은 작품들도 강제로 관람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기다렸던 것처럼 박물관 내부 역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의 행렬에 같이 휩쓸려 이리저리 같이 돌아다닌다. 


바티칸 시국에 있는 박물관 답게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많은 그림들이 눈에 띈다. 그림을 그리는 기법, 사용하는 도구 등 많은 것들의 변화가 눈에 보이지만 그래도 그리스도라는 한 가지 주제는 영원하다. 아기 예수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까지... 이렇게 몇 천년 동안 한 사람을 주제로 이렇게 놀라운 예술활동이 펼쳐졌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은 참 대단하다.

루브르에서 본 것 같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을 경배하는 동상과, 이집트가 얼마나 핍박받고 살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이집트 유물들을 뒤로 하고, 또 하나의 명작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철학을 주제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모습을 재기 넘치게 그린 그림. 누가 누구인지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계단에 널브러져 있는 디오게네스, 못생긴 들창코의 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등. 50명이 넘는 사람이 그려져 있지만 대부분 나는 잘 모른다. ^^ 한국인 단체관광객을 이끌고 온 가이드 덕분에 그림에 대한 설명을 몰래 들으며 그림을 감상하는 중,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모든 한국인 관광객들이 갑자기 바티칸 미술관 티켓을 들고 "아테네 학당" 그림을 배경으로 바티칸에 왔다는 인증샷을 찍고 있다. 

 "이렇게 하면 멋진 인증샷이 되죠? 카톡 배경에, 블로그에 올리시면 돼요~" 

한국과 중국 투어에서만 찾을 수 있을 그 장면을 보며 그들에게 미안했지만 20명이 갑자기 같은 사진을 찍는 장면이 부끄러워 그 방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사람의 물결에 지쳐 이제 그만 박물관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박물관이 그렇게 숨겨두었던 마지막 장소 '시스타나 예배당'에 도착하였다. 다가갈수록 어두워지는 조명, 그리고 늘어나는 정체구간. 그렇게 기다리기는 몇 분. 드디어 그림으로만 보아왔던 시스타나 예배당의 천장화가 내 머리 위에 펼쳐져 있다. 구약 성경의 각 부분을 친절하게 그려놓은 대작. 발 디딜 틈도 없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덕에 그 성당의 정체 천장을 채우고 있는 그림을 자세하게 다 보진 못하였다. 그리고 목도 꽤 아프다. 더군다나 "No Photo"를 외치며 사람들 사이를 끊임없이 비집고 다니는 경비원들 덕에 분위기는 상당히 어수선하다. 비록 구약성경을 반 정도만 읽어 모든 내용을 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볼 때면 아는 척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우리나라 성형외과의 광고로도 쓰이는 천장화의 '천지창조' 부분은 천장의 정중앙에 위치해 항상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다. 천장의 높이도 어마어마한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그려낸 걸까.

그리고 한 벽을 전체 채우고 있는 "최후의 심판".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천국으로 가는 자들과 지옥불에 떨어지는 자들이 한 그림 앞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멋진 몸을 하고 있는 젊은 예수가 있다. 이 어마어마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표정과 몸이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바티칸 박물관의 나선형 출구

그 괴팍한 성격 덕에 좋지 않은 인간관계, 그리고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사람들, 밀리는 급여에 지체되는 작업, 돈 달라고 괴롭히는 아버지와 형, 아픈 동생 그리고 오랜 천장화 작업으로 인해 얻은 목 디스크... 미켈란젤로는 그 상황에서 이렇게 대작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런 상황이 그로 하여금 오히려 몰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도록 그를 이끌었을까. 천재성만으로는 이런 대작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항상 우울함과 불행을 느끼며 살았다고 하는데, 그 덕에 우리의 눈은 이렇게 호강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들의 인생에 힘든 일이 많았을 때, 불후의 명작이 탄생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우리 같은 범인은 힘든 일이 그에게 발생한 것에 대해 묘한 감사를 해야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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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돌아온싱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