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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2.15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다행이야
출처: 네이버 영화

한창 감수성이 퐁퐁 솟아나던 고등학교 1학년,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츠지 히토나리 지음, 소담출판사)란 책을 읽었다. 러브신이 나오는 장면에선 혼자 얼굴 빨개져서 가슴 벌렁대며 읽다가, 헤어진 연인(아오이)을 잊지 못하면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남자 주인공 준세이를 이해 못하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스무 살에 만났던 준세이와 아오이는 아오이가 서른 살이 되는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쿠폴라(반구형으로 된 지붕이나 천장)에서 만나기로 한다. 어찌나 로맨틱하였는지 10년이 지나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던 둘은 결국 두오모에서 다시 만난다.


“우리도 2년 후에 약속 정해놓고 만날까? 우리가 그때까지 만나든 헤어지든 상관없이?”


스무 살의 어느 날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 영화로 개봉된 『냉정과 열정 사이』이야기를 하다가 장난스럽게 약속했다. 군대라는 거대한 산을 앞에 두고 있던 우리에게 서른 살은 존재하기나 하나 싶을 정도의 먼 날이었다.


‘피렌체는 과거야. 나는 그곳에서 과거를 복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


영화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 타령을 하며 툭하면 넋 놓고 먼산을 보던(‘멍 때리기 대회’에 나가면 우승 가능성이 높은) 준세이에게서 ‘피렌체=과거’라고 세뇌당한 채로 도착했다. 그 책을 재미나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에 대한 기대를 가득 안고.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약속했던 그 두오모 성당, 드디어 나도 그곳에 왔다. 어린 시절의 사랑을 여전히 믿었던 두 연인은 10년이 지나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좋아한다는 마음에 믿음 대신 의심을 보냈던 나는 이곳에 혼자 서 있다. 믿음이 부족한 자는 종교뿐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 당장은 더 많이 믿는 사람이 손해 같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그 순간에 더 많은 믿음과 사랑을 보낸 쪽이 더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아오이가 왜 하필 성당 꼭대기를 만남의 장소로 정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두오모 성당에 꼭 가 보겠다고 다짐했던 10년 전의 그 소녀는 그곳에 한 번 들어가 보겠다고 줄 서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치여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오이의 생일은 아마 여름은 아니었을 거다. 성수기 한여름이었다면 관광객에 치여 성당 입장에만 몇 시간을 기다리고, 막상 올라가서는 셀카봉을 들고 설쳐대는 수많은 사람들에 치여 정작 준세이 그림자도 못 봤을 것이다. 것도 아니면 긴 기다림에 지쳐 올라가기를 포기했거나. 그렇다. 피렌체에 들어선 지 1시간, 괜히 난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예쁜 원피스를 입은 시원한 키의 여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버스킹도 역시 그 지역에 어울려야 되는 듯 아름답고 차분한 선율이 대성당 앞마당을 가득 채웠다. 나의 열등감은 내 믿음만큼이나 가벼웠던지 그녀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음악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두오모 성당은 내부도 멋있지만 붓으로 칠한듯한 외관이 아름답고 독특하다. 초록과 하얀색의 조합은 묘하게 아름답지만, 왠지 쉽게 벗겨질 것 같아서 자주 관리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항상 마음을 쓰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걸 가르치려는 옛사람들의 의도가 아닐까?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줄 알고 함부로 대하는 관계는 결국 끝이 나기 마련이니까.


두오모 성당에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지 10년인데, 막상 와 보니 쿠폴라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다. 희미해진 기억과 함께 두오모의 쿠폴라에 오르는 꿈도 옅어진 걸까? 두오모 성당의 사진만으로도 행복과 서글픔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의 뜨거움은 무덤덤함으로 변했다. 아쉽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씁쓸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덜 북적이는 두오모 대성당 맞은편, ‘조토의 종탑’ 꼭대기에 올랐다. 빨간 지붕의 피렌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씁쓸함이 사라지고 탄성이 나왔다. 준세이를 이끄는 건 언제나 과거였지만, 현재의 나를 이끄는 건 ‘어디 가야 사람이 좀 더 없을까? 어디 가야 좀 더 편할까?’였다. 10년 동안 가 보고 싶었던 두오모 따위가 아니라.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강에는 소설가 단테가 그의 첫사랑 베아트리체를 만난 베키오 다리가 있다. 굳이 그 다리를 찾을 수고도 없이 멀리서 사람들의 머리가 빽빽이 보이는 다리를 봤다면 그 다리가 바로 베키오 다리다. 『냉정과 열정 사이』부터 소설가 단테라니…… 피렌체는 정말 로맨스가 뚝뚝 묻어나는 곳이다. 양쪽으로 상점이 들어선 다리는 굉장히 독특하지만, 그 때문에 정작 다리 위에서 강을 볼 수는 없다. 예전에는 다리를 따라 푸줏간이 길게 늘어서 있다고 했는데 그곳의 냄새가 싫었던 왕은 푸줏간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고 대신 보석 가게를 들였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베키오 다리 위에는 보석 가게가 넘쳐난다. 로맨틱한 감정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연인들이라면 여기서 반짝거리는 것을 손가락에 끼고 나오겠지? 다리 위의 보석가게를 그대로 남겨둔 건 바로 그 이유가 아닐까? 보석가게 때문에 자물쇠를 달 틈이 없는 다리지만, 사랑을 약속하고 싶은 연인들은 기어코 자물쇠를 달아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곳에 단거야? 꼭 그렇게 해야 너희의 사랑이 영원하니?’라고 묻고 싶지만, 『냉정과 열정 사이』가 소설이라면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실존 인물들이다. 실화가 주는 감동은 사람들을 이 곳으로 이끌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물쇠를 걸게 만든다. 그렇게 자물쇠는 인기상품이 되어버렸다.

다리를 건넜다. 시끄러운 곳에 있다가 상대적으로 조용한 반대편으로 오니 그제야 아름다운 피렌체가 보였다. 깨끗하지 않지만 조용하게 흐르는 강과, 귀여운 젤라토 가게,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유유 히도시를 즐기는 사람들. 그 풍경이야말로 이곳을 정말 로맨틱하게 만들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과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니 마침내 피렌체가 나타났다.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석양을 만끽하기 위해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왔다. 이곳도 이미 유명한 곳인 듯 기념품을 파는 트럭과 좌판이 쫙 깔려 있었고, 사람들은 광장의 계단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지는 태양과 피렌체의 빨간 지붕은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곳에 있어 감사한 마음이 샘솟았다. 

과거에 사는 찌질남이라며 준세이를 타박했지만, 막상 피렌체에 와 보니 그런 그가 이해됐다. 덕분에 피렌체에 와서 아주 오래 동안 잊었던 얼굴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내가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란 상상을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참 잊기 힘들 줄 알았는데 결국은 잊었다. 그리움도 과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수많은 기억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영화 속 주인공들과 달리 난 첫사랑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그래서 많이 아팠다 한들 그게 뭐 어떤가? 덕분에 나는 한 사람을 나의 우주로 여겼던 그 시절에 머물렀으면 몰랐을 더 다양하고 큰 세상을 알게 됐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를 보낼 수 있고, 영화를 보고 울 수 있는 감수성을 갖게 됐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아낄 수 있게 됐다. 그런 지금의 내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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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돌아온싱언니